술을 못 마시니 할 만한 일이 없다.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산 건가....술을 못 마시니 딱히 만날 친구도 없다.
내가 친구삼은 인간들은 모두 알콜체인으로 돌돌 감겨있었다.
그들을 만나 밥이나 차를 마시는 일은
상상이 안간다.
반대로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나에게 밥이나 차를 권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거절은 안하더라도. 그들도 거절하지 않겠지만 그냥 그게 별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거지.
딱히 맨 정신으로 오랜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관계.
ㅋㅋㅋ 이제 생각하니 재밌네.
시간이 엄청나게 남는다.
베이킹 등에 아주 제격인 나날이지만, 입덧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은 던전 입구에 맨몸으로 발을 디디는 것만큼의 공포감을 수반한다.
필요한 음료와 과일은 매직스페이스(라는 거창한 이름의 조그만 쪽문)에 두고 간신히 꺼내먹을 뿐.
그런 고로 요샌 다시 책을 읽는다.
그렇다고 새 책을 더 사거나 할 마음은 없다. 그저 읽은 지 오래 돼 가물한 것들을 다시 골라 읽으면 된다.
하루키의 초기작을 읽고 있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재밌었고, 그래서 최근작들이 더 실망스러워졌다.
읽다가 웃겼던 것은-
내가 저 것들을 처음 읽었던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때였나 대학교 새내기때였나.
나름 이것저것 상상하며 열심히 읽어대면서도 생소하고 이국적이어서 상상력을 자극하던 장치들이
제법 친숙한 것들이 되어있었다.
일테면, '너트메그와 시나몬'은 어느샌가 자주 쓰는 향신료가 되어있었고,
야채를 볶고 햄을 볶고 간장을 부어 만든 스파게티는 나도 자주 만들어 먹던 저녁식사다.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부분은 의외로 대강 기술이 돼 있어 아쉬웠지.
재밌었다. 그땐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재미있었는데,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정말 아주 많은 것을 알게 했구나 싶기도 하고
갑자기 주방의 트롤리를 가득 메운 향신료병들을 떠올리며
하루키의 묘사만큼 즐겁게 멋들어진 식사 한끼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러고보니 파스타에 맥주를 곁들여먹던 미혼의 저녁식사는,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었나....